25년 4월 21일,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종하셨습니다.
25년은 희년 선포와 여러 영화의 개봉/재개봉 등 유독 바티칸이 많이 언급되는 해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은 아니지만, 애도하는 마음으로 '두 교황'을 다시 보며, 교황님의 생애, 바티칸 여행, 정보 등을 돌이켜봤습니다.
영화 <두 교황>, 현실과 드라마가 교차한 바티칸 이야기
영화 <두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계를 극적으로 그려냈고, 넷플릭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바티칸 내 측근 비리 스캔들(바티리크스) 등으로 600년 만에 처음으로 교황직에서 자진 사임하고 명예 교황으로 남았습니다.
두 교황은 영화 내내 그들의 대화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르헨티나에서의 사역,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사건과 그때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내적 갈등 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영화는 허구적 요소를 넣어, 교황님들을 조금더 위트 있고 귀엽게 그리고 있는데요. 영화에서 두 교황은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극명한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우정을 키우는 모습으로 그려지나, 실제로는 두 교황 간의 사적인 대화나 만남은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재밌는 점은 두 교황님들이 엄청난 축구 매니아였다는 것인데요, (영화에서는 베네딕토 16세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려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쿠키영상에서는 두 교황이 함께 독일-아르헨티나 월드컵 경기를 관람한 에피소드가 나오나 이는 허구라고 합니다. 실제 두 교황은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관람을 피했다고 해요. 그렇지만 극 중 등장하는 베네딕토 교황님 맥주를 좋아한다거나(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바이에른 전통 밀맥주라고 합니다), 피아노 연주에 조예가 싶다는 부분은 실제에 기반 한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들 때문에 베네딕토 교황의 고향에서는 교황님의 얼굴을 넣은 맥주를 출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영화는 사실적 사건과 극적인 허구를 절묘하게 섞어 두 인물의 신학적 갈등과 인간적 고뇌를 표현하면서도 신의 대리자인 교황님들의 인간적인 면을 그려내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영화에서 언급된 몇 가지 사건들과 교황님의 생애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영화 속 사건 '바티리크스' 와 '더러운 전쟁'
바티리크스(Vatileaks, Vatican leaks scandal)
- 정의 및 배경
바티리크스(Vatileaks)는 2012년 바티칸 내부 기밀문서가 외부로 유출되어 바티칸의 부패, 권력 다툼, 재정 비리 등이 폭로된 스캔들입니다. 이 사건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집무실에서 일하던 집사 파올로 가브리엘레(Paolo Gabriele)가 주요 문서를 언론에 넘기면서 촉발되었습니다. 유출된 문서에는 교황청 내부의 부패, 금전 거래, 인사 갈등, 교황에 대한 암살 위협 등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의 묘사
영화에서는 이 스캔들이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배경 중 하나로 간접적으로 언급됩니다. 실제로 바티리크스는 교황청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주었고, 교황의 리더십과 교회 개혁 필요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영어 원문
- Vatileaks (Vatican leaks scandal)
더러운 전쟁(Dirty War, 스페인어: Guerra Sucia, 영어: Dirty War)
- 정의 및 배경
‘더러운 전쟁’(Dirty War, 스페인어: Guerra Sucia)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정권이 좌파 세력과 반체제 인사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을 말합니다. 이 시기 군부는 ‘공산주의자’ 또는 반체제 인사로 의심되는 시민 수만 명을 납치, 고문, 살해하거나 ‘실종’시켰으며, 희생자는 10,000~30,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 영화에서의 묘사
영화 <두 교황>은 프란치스코 교황(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 시절 두 신부가 군부에 납치·고문당한 사건과,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죄책감과 고뇌를 다룹니다. 실제로도 베르고글리오가 군부와의 타협을 통해 예수회 신부들을 지키려 했다는 논란이 있었고, 이는 영화의 핵심 갈등 중 하나로 그려집니다. - 영어 및 스페인어 원문
- 영어: Dirty War
- 스페인어: Guerra Sucia
베네딕토 16세에 관하여
안토니 홉킨스와 싱크로율이 너무 높았던 탓일까요? 베네딕토 교황님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요체프 알로이스 라칭거)
사실 전임과 후임 교황이 워낙 사랑을 받은 탓에 덜 조명된 부분이 있지만, 베네딕토 16세는 교황 선출 전부터 '진리의 수호자와 겸손한 순례자'로 유명한 성직 자였다고 합니다. 교황이 된 이후에도 추기경들이 해야 할 불편한 말들이 있다면, 나쁜 말 듣기를 주저하지 않고 직접 했다고 해요.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 진리를 좇던 소년>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거)는 1927년 독일 바이에른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으며, 어머니는 호텔 요리사, 아버지는 경찰관이었습니다. 1930년대 독일은 나치의 압박과 실업, 전쟁 배상 등으로 혼란스러웠고, 라칭거 가족은 여러 시골 마을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2.
그런 현실 속에서 요제프는 “교회는 진리와 정의의 성채”라며, 신앙을 통해 혼돈의 시대를 이겨내려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단호한 반나치주의자였고, 요제프 역시 교회를 ‘거짓과 무신론에 맞서는 진리의 보루’로 여겼습니다 2.
<성직자의 길, 형의 영향>
라칭거 형제는 모두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형 게오르크 라칭거는 저명한 성직자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겐스부르크 대성당 소년합창단(“Regensburger Domspatzen”)의 지휘자였습니다. 요제프는 “형은 내 인생의 신뢰할 수 있는 안내자이자, 항상 옳은 길을 보여준 나침반”이었다고 회상합니다 4. 어린 시절부터 두 형제는 함께 음악을 사랑했고, 신앙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성장했습니다.
<성직자의 꿈, 그리고 바티칸 고문서관>
요제프 라칭거는 원래 조용한 학자적 기질이 강했습니다. 그는 신학 연구와 강의를 사랑했고, 바티칸 고문서관에서 일하며 교회의 지적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등 주요 직책을 맡으며 점점 교회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결국 2005년 교황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는 훗날 “나는 교황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나이가 많다고 여겼고, 학자로 남고 싶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6.
<진리의 수호자>
베네딕토 16세는 평생 ‘진리의 절대성’을 강조했습니다. “진리는 결코 상대적일 수 없다. 진리는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그의 신념은 교황 재임 내내 이어졌습니다. 그는 “거짓과 타협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라며, 신앙의 본질과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음악과 일상, 그리고 가족>
그는 음악을 매우 사랑해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고, 형과 함께 모차르트 음악을 즐겼습니다. 바이에른의 마리아 성지인 알퇴팅(Altötting)은 그의 영적 고향이었으며, 성 요셉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보나벤투라를 인생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교황이 된 후에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가족 전통을 따라 복음서를 읽고 캐럴을 부르며 소박한 신앙의 정취를 잊지 않았습니다.
<명예교황 이후, 완전한 은둔과 겸손>
2013년, 그는 건강 악화와 고령을 이유로 600년 만에 자진 사임한 첫 교황이 되었습니다. 사임 후 ‘명예교황’(Pope Emeritus)으로 바티칸의 마테르 에클레시아 수도원에 머물며,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겠다”며 세상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는 교회 내외의 정치적 논쟁이나 후임 교황의 결정에 결코 개입하지 않았고, 교황청과 신자들로부터 “진정한 겸손과 품위, 교회의 일치를 보여준 인물”로 존경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순례의 길을 시작하는 단순한 순례자일 뿐입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평생 진리를 좇았던 한 신앙인의 고백으로 남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하여
<프란치스코란 이름의 상징>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명으로 택한 ‘프란치스코’는 13세기 이탈리아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서 유래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로, 가난·평화·생명 존중의 상징입니다. 교황은 콘클라베가 끝난 당시 한 추기경이 남긴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조언에 감동받아 이 이름을 선택했고, 이는 ‘청렴과 헌신, 그리고 어려운 이들을 위한 교회’라는 자신의 비전을 담은 결정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삶>
- 평범한 노동자 가정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민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은 어린 시절부터 공장 일, 나이트클럽 문지기, 연구실 보조 등 다양한 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습니다 139.
21살 때 폐렴으로 폐 일부를 절제하는 등 큰 시련도 겪었지만, 이 경험이 오히려 인생을 돌아보고 신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7. - 예수회 입회와 사목
젊은 시절 예수회에 입회해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 신학교 교수, 대학 학장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빈민촌에서의 사목 활동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헌신은 평생 그의 신앙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114. - 대주교와 추기경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 등 요직을 거치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소박한 생활을 실천해 ‘거리의 주교’로 불렸습니다 4.
빈민가를 자주 방문해 노숙자, 마약 중독자, 범죄자 등 사회적 약자와 직접 소통했고, 발을 씻어주고 입을 맞추는 등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29.
<교황 즉위 이후의 변화와 선례 타파>
- 파격적인 행보
2013년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부터 교황궁 대신 일반 성직자 숙소에 머물렀고, 직접 중고차를 운전하며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교황청의 고위직 보너스와 관행을 폐지하고, 투명성 강화와 재정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집 없는 이들과 식사를 함께하고, 난민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등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강조했습니다
성직자 성추문 문제에 단호하게 대응하고, 여성·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적 메시지로 교회의 문턱을 낮췄습니다 - 행동하는 리더십
교황 즉위 미사에서 직접 차에서 내려 병자를 축복하고, 세족식에서 여성의 발을 씻기는 등 기존 교황들이 하지 않던 행동으로 전 세계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했습니다 - 환경과 평화의 사도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통해 기후위기와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천명했고, 종교 간 대화와 세계 평화에도 앞장섰습니다
<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랑받았나>
- 겸손과 진정성
교황의 권위 대신 ‘낮은 곳’에서 약자와 함께하는 모습, 유머와 따뜻한 화법, 먼저 신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인간적인 태도는 전통적 교황상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 행동으로 보여주는 용기
인도주의적 선행에 그치지 않고, 사회 구조의 불평등과 악을 비판하며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는 용기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 글로벌 멘토와 변화의 상징
교황의 메시지는 종교를 넘어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고, 가톨릭 신자의 증가와 젊은 세대의 관심, 바티칸 관광객 증가 등 ‘프란치스코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2025년 희년 선포의 의미
희년(Jubilee)은 원칙적으로 25년마다 선포되는 특별한 은총의 해입니다. 최근 희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포한 2015년 "자비의 희년"이며, 이전의 2000년 "대희년"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역사상 처음으로 바티칸 성문을 개방하여 전 세계 신자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5년을 ‘희망의 희년’으로 공식 선포하며,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과 낙담으로 얼룩진 세계에서 기쁘게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자”라고 요청했습니다. 교황은 이번 희년의 주제를 ‘희망’으로 정하고, 전쟁·분열·빈곤·기후위기 등으로 고통받는 현대 사회에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절실히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교황의 칙서 「희망은 실망하지 않는다(Spes Non Confundit)」에는 “신앙인들은 구원의 통로인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다 친밀하게 가져야 하고, 교회는 항상, 어디에서나,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우리의 희망이라고 선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희년은 신앙을 새롭게 하고, 화해와 회복을 다짐하는 특별한 시기입니다. 교황은 특히 “희년은 우리 삶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임을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한 돌봄과 자비의 실천도 요청했습니다
또한, 2025년은 니케아공의회 1700주년이 되는 해로, 교회 일치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연대를 위한 의미도 더해졌습니다
희년 필수 성지 순례지, 로마의 4대 성당
희년 기간 로마의 주요 4대 성당을 방문하면 특별한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해당 성당들은 24년 12월 24일(크리스마스이브)을 기해 순차적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바티칸에 위치한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성당입니다. 두 교황님의 무덤 역시 성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성 바오로 대성당(Basilica Papale San Paolo fuori le Mura):
로마의 제2대 성당이며, 성 바오로 사도의 무덤이 있어 많은 교황들이 안치된 역사적 장소입니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Arci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 공식적인 로마 주교좌성당으로 교황의 공식 성당이며, 교회법상 모든 교회의 어머니로 여겨집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역사적으로 많은 교황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베네딕토 16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차기 교황 전망, 바티칸의 새로운 시대
차기 교황 선출 전망은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 출신 추기경들이 언급되며, 가톨릭 교회가 제3세계와 현대적 가치를 반영한 교황을 선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됩니다. 이번 콘클라베의 결과가 가톨릭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콘클라베(Conclave), 유흥식 추기경의 역사적인 참여>
교황이 선종하면 바티칸은 차기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회의인 콘클라베를 개최합니다. 콘클라베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진행되며, 만 80세 미만의 추기경들이 참여합니다. 특히 이번 콘클라베에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한국인으로서는 1978년 김수환 추기경 이후 47년 만에 참가하여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유흥식 추기경은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바티칸 내 아시아 및 제3세계 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바티칸 여행시 참조! 성 베드로 대성당은 일반적으로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됩니다. 그러나 교황의 장례식이나 콘클라베 기간 등 바티칸의 특별한 행사나 비상 상황 발생 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거나 성당이 폐쇄될 수 있으니 여행 전에 꼭 확인하세요!
이렇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부터 차기 교황 전망까지 바티칸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정리했습니다. 바티칸 여행과 가톨릭 문화에 관심 있는 분들께 유익한 정보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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